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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Bryce

둘째 날, 브라이스의 아침

시차에 적응이 되어 있지 않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무척 쉽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대로 잠을 자기가 힘들다. 몸은 피곤한데 머리는 띵하면서 자꾸 잠을 거부한다. 얼핏 꿈을 꾸기는 하지만 계속 다른 꿈이 이어진다. 왠지 방 안이 답답하다. 자다 깨서 밖에 나가 본다. 별이 가득하다. 별이 너무 많아 알고 있는 별자리 찾기가 힘들다. 그게 그 별 같고 저쯤에 하나쯤 있을 자리에 빼곡하니 별들이 빛나고 있다. 어느 구석을 들여다 보아도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부지기수로 모여 있는 듯 하다. 아! 저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었다면……

둘째 날 아침, 서둘러 준비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토러스 뒤로 랜드크루저가 바짝 붙어 따라온다. ‘저 놈 역시 사진가인 모양이군.’ 느긋할 수 밖에 없는 미국의 산골짜기 시골에서 해도 뜨기 전의 이른 새벽부터 험하게 차를 몰아대는 건 해를 쫓아 하루를 시작하는 사진가일 가능성이 거의 틀림없다.

한달음에 차를 몰아 브라이스의 선라이즈 포인트에 들어선다. 따라오던 렌드크루저 역시 급하게 차를 세운다. 짜식, 서두르긴……. 옷깃을 추스르고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를 챙겨 포인트를 오른다. 그런데…… 무릎이 예사롭지 않다. 시큰거리기도 하고, 어쩔 때는 제법 통증이 오기도 한다. 인대가 약간 늘어난 데에다 연골에도 살짝 상처가 생긴 모양이다. 게다가 맨발로 물 속을 헤치고 다녔던 발에는 여기저기 피부가 벗겨져 쓰리다. 그야말로 상처투성이 상이군인의 몰골이다.

할 수 없다. 절뚝거리며 삼각대를 을러메고 포인트를 오른다. 다행히 그리 먼 길은 아니다. 포인트에는 이미 3-40명의 사진가들이 이제 막 떠오른 해를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다. 아! 이렇게 찬란한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다. 다리 아픈 것도 잊어 버리고 사진을 찍어댄다. 5년 동안 잊지 못하고 기다려 온 순간이다. 하늘엔 구름도 없다. 뿌연 안개도 없다. 오직 동전만한 원반 모양의 태양과, 그 앞에 찬란히 하루의 첫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태고의 자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장관 앞에서 사진가는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 이 순간은 담을 수 있어 행복하다. 브라이스에서 이 기막힌 순간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 정말로 행복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제 떨어뜨려 사라져 버린 15밀리의 광각도 아쉽지 않다. 변변치 않은 내 사진 실력도 아쉬워할 틈이 없다. 이 놀라운 자연의 신비, 몇 십 억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반복되었을 이 순간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 모든 아쉬움은 날려 버릴 수 있다.

계곡의 제법 깊숙한 곳까지 햇살이 드리운다. 급한 성격의 사진가들은 이미 다른 포인트로 떠나고 주변에는 뒤늦게 찾아온 어중간한 관광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J가 삼각대에 카메라를 얹어 놓은 채로 저쪽의 바위 뒤에서 돌아 나온다. 저 녀석 역시 어느 구석에서 자기만의 멋진 하루를 시작했으리라. 어제 자이언에서의 고생이 어느 정도는 만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햄, 진짜 멋지다.”

“많이 찍었어?”

“찍기야 많이 찍었죠. 실력이 안 따라와 주니 그렇지……”

늘상 오가는 대화가 여기까지 와서도 반복된다. 눈으로 목도한 광경이 멋질수록 그것을 담아야 하는 얼치기 아마추어 사진가의 심적 부담은 더욱 더 심해질 수 밖에 없다. 헌데 J도 걸음이 편치가 않다.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란다. 브라이스의 저 아래 편까지 내려가 보는 것은 다음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 언제가 될 지 기약은 없지만 말이다. 여행이란 늘 무엇인가를 흘리고 다니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것이 선글라스일 수도 있고, 아끼던 모자일 수도 있으며,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던지, 혹은 그 밖의 무엇이던 말이다.

많은 사진과 함께 또 그 만큼의 미련은 남기고 브라이스를 떠났다. 브라이스 캐년을 떠나 2-3킬로미터 밖에 있는 자그마한 뷰포인트. 우리는 여기서 브라이스의 아래쪽을 엿 볼 수 있었다. 위에서 본 브라이스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푸르디 푸른 하늘과 함께 브라이스의 색을 담을 수 있었던 행운, 아마도 브라이스가 우리에게 선사한 작별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