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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Prologue

Prologue

사람들은 늘 여행을 꿈꾼다. 막연히 유럽, 남태평양, 혹은 인도...

왜일까?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
경험, 구경, 배움, 깨달음, 혹은 벗어남, , 등등
...
책이나 사진 TV 등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는 충족시키지 못하는 무엇이 여행에는 있다
.

나 역시 늘 꿈꾸는 곳이 있다
.  

2002
, 월드컵의 뜨거운 여름을 기다리던 봄, 신산해지고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려 보고 싶어 무작정 떠났던 그 곳. 그리고 5년 후, 여유롭게 사진을 찍어 보고 싶어 다시 찾았던 그 곳, 그랜드써클이다.

 

보통은 가 본 적이 없는 곳을 꿈꾸지만 이미 두 번, 출장 때 잠시 짬을 낸 것 까지 포함하면 네 번이나 가 본 곳을 꿈꾸다니…… 그렇다고 세계 방방 곡곡을 모두 돌아다녀 본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왜 하필 그랜드서클?

 

1999년 벤처 열풍 속에 ‘이대로 월급쟁이로 살 수는 없다.’며, 잘 다니던, 대학생 선호도 1위 직장을 호기롭게 뛰쳐나왔다. 동료들과 함께 만들었지만 이런 저런 미숙함에 따른 실망과 불화로 회사를 그만 둔 것은 그로부터 3년 만인 2002 3월이었다. 용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용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껍데기 객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생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멀건이 학교 가는 혜진이를 배웅해 주고, 하루 종일 혜나랑 놀아주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속이 없는 시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소문이 어떻게 돌았는지 와서 일을 좀 도와달라는 선배들의 전화도 가끔 있었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호기심에 가까운 전화도 있었다
.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당분간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려 보고 싶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나니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우리나라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 보고 싶어졌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대뜸 해외로 나갔다 오란다. 마음을 비울 거면 아예 멀리 가서 비우고 오라고…… 우리나라야 언제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지만 이렇게 놀고 있을 때 아니면 언제 맘 편하게 해외여행하고 오겠냐고…… 늘 그렇지만 내 아내는 천사다
.

뻔뻔스럽게도 백수 시절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다녀 온 곳이 그랜드써클이었다. 이것저것 고민할 것 없이 그냥 몸만 떠나면 되는 곳,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깨닫고 올 수 있는 곳, 사람이 살아가는 여러 모습들을 스쳐 지나면서 내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곳…… 그랜드써클은 그런 곳이다
.

여행을 다녀 온 후 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었고, 이따금씩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그 곳에서 심어온 풍경이나 모습들을 떠올리며 여행을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여행 다녀온 후 만들어 놓은 홈페이지를 들여다 보면서 다시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돌아보곤 한다
.

문제는 사진이었다. 집에서 쓰던 PC가 몇 번이고 교체되는 과정에서 2002년도에 찍었던 사진들의 원본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당시에는 사진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기에 똑딱이 카메라에 640*480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해상도로 찍은 사진들이었지만 그마저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남은 것이라곤 홈페이지에 들어 있는 손톱만한 이미지들뿐……


2003
년 늦가을, 어쩌다 사진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게 되었고, 비싼 카메라와 렌즈들을 장만하고 나름대로는 폼 잡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랜드써클은 또다시 꿈에 그리는 엘도라도로 변해 있었다. 그 멋진 풍광을 제대로 된 카메라로 제대로 찍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1년에 겨우 일주일 있는 휴가를 가지고 그랜드써클을 다시 여행한다는 건 꿈같은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생뚱 맞은 출사 여행

나른한 여름 오후, 점심을 마치고 들어온 사무실은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밖에서 묻혀온 더위를 식혀 주고 있다. 일은 많고, 진도는 잘 안 나가고, 날씨는 덥고…… 휴가 떠나는 친구들이 부럽지만 여름이 성수기인 업종의 특성상 여름은 오롯이 사무실에서 보내야 한다.

“햄, 머하33?”

메신저의 발신자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J다. 녀석 말고는 나를 햄으로 부르는 친구는 아무도 없다. 선생님은 줄여서 샘, 형님을 줄여서 햄…… 줄임말이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소시지도 아니고 햄이라고 부르는 건 별로 탐탁지 않지만 몇 번을 잔소릴 해도 이 녀석의 고집을 꺾기는 난망한 일이다.

“걍…… 졸아……”

역시나 한심스런 대답이다. 늘 이런 식이다. 특별히 출사 꺼리나 주식 소재가 있지 않은 다음에는 이렇게 따분한 대화가 잠시 오가다 썰렁하게 대화가 끝나곤 한다. 30대 중반과 40대 초반의 아저씨간의 메신저 대화에서 뭐 그리 화끈한 걸 기대할 수 있겠냐 말이다.

문득 ‘일상탈출’이라는 단어가 생각났고,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던져 봤다.

“가을에 미국 출사 안 갈려?”

“……”

역시나 대꾸가 없다.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테고, 내 질문이 진심인지 지나가는 이야기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허걱~~~”

이건 좀 의외의 반응이다. 어느 만큼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판인데, 사실 J가 출사를 간다고 해도 내가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판국인데…… 아내하고 아이들한테는 뭐라 이야기를 할 거며, 휴가 날짜 잡기도 만만치 않은데……

“까짓 거, 갑시다.”

사고가 났다. 대형사고다.

J를 알게 된 지도 벌써 4년째다. 2004년쯤 사진 동호회에서 둘 다 얼치기 초짜의 모습으로 만났으니 말이다. 나로서는 모처럼 마음이 맞는 동생이 생긴 셈이고, J녀석도 ‘햄, 햄……’ 하면서 어울려 다니는 것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많은 곳에 함께 사진 찍으러 다녔고, 술도 많이 마셨다. 이름뿐인 동문 선후배 보다는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이젠 전화 목소리만 잠깐 들어도 어제의 소개팅에 어떤 아가씨가 나왔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빤한 사이가 되었다.

이런 녀석이 ‘까짓 거, 갑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건, 결국은 출사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고 내가 머뭇거리게 되면 가기로 할 때까지 계속 J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하긴, 대책 없이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은 내 전매 특허이기도 하다.

“그래. 좋다. 언제 갈까?”

다행히 둘 다 라스베가스 왕복에 필요한 마일리지는 가지고 있었고, 여행 경비는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일사천리로 스케줄을 잡고 항공권을 예매했다. 그리고…… 결국……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