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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s/Zion

자이언 캐년(Zion Canyon)

새벽 해도 뜨기 전에 숙소를 나왔다. 사진을 찍으러 여행을 온 이상 일출의 찬란함을 놓칠 수 없다. 의욕은 앞섰지만 준비는 부족했다. 일상 탈출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출사랍시고 떠난 것인데 일출과 일몰 시간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하늘이 훤해져 오는데 어디서 사진을 찍어야 할지 도통 판단이 서지 않는다. 대충 그림이 될 것 같은 바위 산을 놓고 몇 컷 찍어 보다 자이언캐년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결국 여행 첫 날의 첫 해는 자이언으로 가던 도중에 만나게 된다. 캐년 입구 거의 다 와서, 어느 자그마한 리조트가 있는 마을에서 뜨겁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만났다. 역시 아마추어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이 한심스러워 진다. 어찌되었건 발길을 서두른다.

자이언캐년에는 꼭 가 봐야 할 곳이 있었다. 2002년 혼자 왔을 때 사진으로만 감동하고 돌아왔던 ‘The Narrows’라는 포인트. 환상적인 사진이었고, 사진을 찍겠다고 나선 이상 그 곳에 가서 꼭 사진을 찍어 보고 싶었다.

J를 재촉하여 길을 나섰다. 영문도 모르는 J는 내가 ‘좋은 포인트가 있다.’며 길을 재촉하니 그냥 따라 나선다. 한참을 걷다 보니 개울이 길을 막아 선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발 길을 돌린다. ‘그래, 5년 전에도 여기까지였었지.’ 그 때의 기억이 아련하다. 이쯤에서 저 쪽으로 삼각대를 받쳐 놓고 사진을 찍었었다. 이번에는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바지를 걷어 붙이고 양말을 벗었다. J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다. 하지만 워낙 단호한 내 태도에 별 시비를 걸지 못한다. 난 이미 한 번 와 본 곳이거든. 진실과는 상관없이 경험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신뢰도를 주게 마련이다. 결국 J도 바지를 올려 붙이고 개울물로 들어선다.

10월의 계곡물은 생각보다 차다. 하지만 우리의 머리 곳에는 단 하나 ‘환상적인 포인트’ 밖에 없었다. 그 곳이 나올 때까지 가보는 거다.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차디찬 계곡물에 담근 발은 허벅지까지 물에 젖었다. 이내 나올 것처럼 보였던 포인트는 가도 가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계곡이 더 좁아질 것 같은데, 저 앞의 굽이를 돌아보아도 그다지 좁아지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맞은 편에서 내려오는 부지런한 관광객도 있다. 한 시간 반쯤 갔을까, 두 갈래 길이 나온다. J는 이미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한 날 버리고 저 앞으로 내쳐 나간 지 오래다. 모처럼 드러낸 마른 모래밭에 장비를 놓고 한 숨 돌린다. J를 불러 본다. 잠시 후 넓은 쪽에서 J가 나타난다.

“햄…… 뭐 이래……”

“왜?”

“25km는 더 가야 끝이라는데?”

“……”

맞은 편에서 내려오던 관광객(등반객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에게 물어 본 모양이다.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다. 지금까지 왔던 기세로 보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고도 남을 것 같다. ‘젠장, 그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그 사진을 찍었다는 거지?’ 혼자 성을 내어 보기도 하지만 J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당당해 지자.

“그럼, 여기서 돌아가자.”
“……”

J의 눈초리는 싸늘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와 봤다며!’ 외치면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하긴 질척거리는 신발을 흙탕물에 담그고 허벅지까지 빠져가며 두 시간을 왔는데, 돌아가자니……

“여기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안 오는 곳이야.”

위안이랍시고 던진 나의 한 마디. 위안이라기 보다 차라리 변명에 가깝다. J도 지쳤는지 격하게 반항할 기세는 아니다. 얼치기 같은 선배 때문에 자네가 덩달아 고생이군. 미안허이……

돌아 나오는 길 역시 에누리 없이 두 시간 정도가 흘렀다. 시간만 허비한 것은 아니다. J와 나, 둘 다 무릎이 시큰거린다. 센 모래 물살에 쓸린 탓인지 허벅지 피부도 따끔거린다. 등산화는 철퍼덕거리고, 양말은 질척거린다.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밀도 높은 계곡물을 듬뿍 흡수한 청바지는 사정없이 발걸음을 짓누른다.

준비 없는 객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나마 난 2002년에 자이언의 다른 트레일들을 경험해 보았으니 자이언이 주는 아기자기함을 알고 있지만 J에게 자이언은 그야말로 고통스런 곳으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여행의 첫 시작부터 고생길로 만들어 버려 면목이 없다. 그래도 남들 없는 사진은 많이 건지지 않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