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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Articles/Prologue 2009.11.18 21:04

사람들은 늘 여행을 꿈꾼다. 막연히 유럽, 남태평양, 혹은 인도...

왜일까?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
경험, 구경, 배움, 깨달음, 혹은 벗어남, , 등등
...
책이나 사진 TV 등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는 충족시키지 못하는 무엇이 여행에는 있다
.

나 역시 늘 꿈꾸는 곳이 있다
.  

2002
, 월드컵의 뜨거운 여름을 기다리던 봄, 신산해지고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려 보고 싶어 무작정 떠났던 그 곳. 그리고 5년 후, 여유롭게 사진을 찍어 보고 싶어 다시 찾았던 그 곳, 그랜드써클이다.

 

보통은 가 본 적이 없는 곳을 꿈꾸지만 이미 두 번, 출장 때 잠시 짬을 낸 것 까지 포함하면 네 번이나 가 본 곳을 꿈꾸다니…… 그렇다고 세계 방방 곡곡을 모두 돌아다녀 본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왜 하필 그랜드서클?

 

1999년 벤처 열풍 속에 ‘이대로 월급쟁이로 살 수는 없다.’며, 잘 다니던, 대학생 선호도 1위 직장을 호기롭게 뛰쳐나왔다. 동료들과 함께 만들었지만 이런 저런 미숙함에 따른 실망과 불화로 회사를 그만 둔 것은 그로부터 3년 만인 2002 3월이었다. 용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용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껍데기 객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인생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멀건이 학교 가는 혜진이를 배웅해 주고, 하루 종일 혜나랑 놀아주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속이 없는 시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소문이 어떻게 돌았는지 와서 일을 좀 도와달라는 선배들의 전화도 가끔 있었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호기심에 가까운 전화도 있었다
.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당분간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려 보고 싶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나니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우리나라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 보고 싶어졌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대뜸 해외로 나갔다 오란다. 마음을 비울 거면 아예 멀리 가서 비우고 오라고…… 우리나라야 언제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지만 이렇게 놀고 있을 때 아니면 언제 맘 편하게 해외여행하고 오겠냐고…… 늘 그렇지만 내 아내는 천사다
.

뻔뻔스럽게도 백수 시절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다녀 온 곳이 그랜드써클이었다. 이것저것 고민할 것 없이 그냥 몸만 떠나면 되는 곳,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깨닫고 올 수 있는 곳, 사람이 살아가는 여러 모습들을 스쳐 지나면서 내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곳…… 그랜드써클은 그런 곳이다
.

여행을 다녀 온 후 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었고, 이따금씩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그 곳에서 심어온 풍경이나 모습들을 떠올리며 여행을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여행 다녀온 후 만들어 놓은 홈페이지를 들여다 보면서 다시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돌아보곤 한다
.

문제는 사진이었다. 집에서 쓰던 PC가 몇 번이고 교체되는 과정에서 2002년도에 찍었던 사진들의 원본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당시에는 사진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기에 똑딱이 카메라에 640*480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해상도로 찍은 사진들이었지만 그마저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남은 것이라곤 홈페이지에 들어 있는 손톱만한 이미지들뿐……


2003
년 늦가을, 어쩌다 사진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게 되었고, 비싼 카메라와 렌즈들을 장만하고 나름대로는 폼 잡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랜드써클은 또다시 꿈에 그리는 엘도라도로 변해 있었다. 그 멋진 풍광을 제대로 된 카메라로 제대로 찍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1년에 겨우 일주일 있는 휴가를 가지고 그랜드써클을 다시 여행한다는 건 꿈같은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생뚱 맞은 출사 여행

나른한 여름 오후, 점심을 마치고 들어온 사무실은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밖에서 묻혀온 더위를 식혀 주고 있다. 일은 많고, 진도는 잘 안 나가고, 날씨는 덥고…… 휴가 떠나는 친구들이 부럽지만 여름이 성수기인 업종의 특성상 여름은 오롯이 사무실에서 보내야 한다.

“햄, 머하33?”

메신저의 발신자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J다. 녀석 말고는 나를 햄으로 부르는 친구는 아무도 없다. 선생님은 줄여서 샘, 형님을 줄여서 햄…… 줄임말이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소시지도 아니고 햄이라고 부르는 건 별로 탐탁지 않지만 몇 번을 잔소릴 해도 이 녀석의 고집을 꺾기는 난망한 일이다.

“걍…… 졸아……”

역시나 한심스런 대답이다. 늘 이런 식이다. 특별히 출사 꺼리나 주식 소재가 있지 않은 다음에는 이렇게 따분한 대화가 잠시 오가다 썰렁하게 대화가 끝나곤 한다. 30대 중반과 40대 초반의 아저씨간의 메신저 대화에서 뭐 그리 화끈한 걸 기대할 수 있겠냐 말이다.

문득 ‘일상탈출’이라는 단어가 생각났고,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를 던져 봤다.

“가을에 미국 출사 안 갈려?”

“……”

역시나 대꾸가 없다.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테고, 내 질문이 진심인지 지나가는 이야기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허걱~~~”

이건 좀 의외의 반응이다. 어느 만큼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판인데, 사실 J가 출사를 간다고 해도 내가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판국인데…… 아내하고 아이들한테는 뭐라 이야기를 할 거며, 휴가 날짜 잡기도 만만치 않은데……

“까짓 거, 갑시다.”

사고가 났다. 대형사고다.

J를 알게 된 지도 벌써 4년째다. 2004년쯤 사진 동호회에서 둘 다 얼치기 초짜의 모습으로 만났으니 말이다. 나로서는 모처럼 마음이 맞는 동생이 생긴 셈이고, J녀석도 ‘햄, 햄……’ 하면서 어울려 다니는 것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많은 곳에 함께 사진 찍으러 다녔고, 술도 많이 마셨다. 이름뿐인 동문 선후배 보다는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이젠 전화 목소리만 잠깐 들어도 어제의 소개팅에 어떤 아가씨가 나왔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빤한 사이가 되었다.

이런 녀석이 ‘까짓 거, 갑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건, 결국은 출사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고 내가 머뭇거리게 되면 가기로 할 때까지 계속 J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하긴, 대책 없이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은 내 전매 특허이기도 하다.

“그래. 좋다. 언제 갈까?”

다행히 둘 다 라스베가스 왕복에 필요한 마일리지는 가지고 있었고, 여행 경비는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일사천리로 스케줄을 잡고 항공권을 예매했다. 그리고…… 결국…… 떠났다.

Posted by 이동구
라스베가스는 유난히 인연이 많은 도시다. 신문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처럼 잭팟이 터졌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기대수익률이 70% 정도인 이 곳의 슬롯 머신에서 50불 이상 써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라스베가스는 도박의 도시는 아니다. 50불도 돈을 따 보겠다는 욕심에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 때우기 용으로 사용된 금액이다. 슬롯 머신 앞에 앉아서 마셔댄 공짜 콜라 잔 수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환영 받을 손님은 아닌 셈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도시를 그대로 옮겨온 럭소부터 뉴욕뉴욕, 엑스칼리버, MGM 등 이름만 들어도 분위기를 짐작케하는 호텔들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테마파크이다. 그리고 이들을 이어주는 모노레일을 생각한다면 라스베가스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거대한 종합 테마파크이다.


메카렌 공항은 이번이 처음이다. 매번 엘에이에서 차를 가지고 오거나 국내선 공항을 이용한 적이 있을 뿐 직항으로 라스베가스에 온 것은 처음이다. 공항에서의 수속은 다른 미국의 도시들과는 달리 매우 신속하게 진행된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도시이기 때문인 듯 하다.

어렵지 않게 렌터카 사무실을 찾아 자동차를 빌렸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포드 신형 토러스 정도면 이번 여행에 충분하다.

이제 출발이다. 미리 예약해 놓은 오늘 밤의 숙소는 라스베가스에서 200km 떨어져 있다. 부지런히 밟으면 세시간이면 간다.

라스베가스가 처음인 J를 위해 잠깐 라스베가스 시내로 들어갔다. 금요일 늦은 오후의 라스베가스는 역시나 많이 막힌다. 돌아오는 길에 좀 더 자세히 라스베가스를 구경하기로 하고 이내 고속도로를 타고 달린다. 사막 위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무척이나 상쾌하다. 이 느낌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다.
Posted by 이동구
TAG Article, Vegas
새벽 해도 뜨기 전에 숙소를 나왔다. 사진을 찍으러 여행을 온 이상 일출의 찬란함을 놓칠 수 없다. 의욕은 앞섰지만 준비는 부족했다. 일상 탈출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출사랍시고 떠난 것인데 일출과 일몰 시간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하늘이 훤해져 오는데 어디서 사진을 찍어야 할지 도통 판단이 서지 않는다. 대충 그림이 될 것 같은 바위 산을 놓고 몇 컷 찍어 보다 자이언캐년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결국 여행 첫 날의 첫 해는 자이언으로 가던 도중에 만나게 된다. 캐년 입구 거의 다 와서, 어느 자그마한 리조트가 있는 마을에서 뜨겁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만났다. 역시 아마추어일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이 한심스러워 진다. 어찌되었건 발길을 서두른다.

자이언캐년에는 꼭 가 봐야 할 곳이 있었다. 2002년 혼자 왔을 때 사진으로만 감동하고 돌아왔던 ‘The Narrows’라는 포인트. 환상적인 사진이었고, 사진을 찍겠다고 나선 이상 그 곳에 가서 꼭 사진을 찍어 보고 싶었다.

J를 재촉하여 길을 나섰다. 영문도 모르는 J는 내가 ‘좋은 포인트가 있다.’며 길을 재촉하니 그냥 따라 나선다. 한참을 걷다 보니 개울이 길을 막아 선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발 길을 돌린다. ‘그래, 5년 전에도 여기까지였었지.’ 그 때의 기억이 아련하다. 이쯤에서 저 쪽으로 삼각대를 받쳐 놓고 사진을 찍었었다. 이번에는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바지를 걷어 붙이고 양말을 벗었다. J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다. 하지만 워낙 단호한 내 태도에 별 시비를 걸지 못한다. 난 이미 한 번 와 본 곳이거든. 진실과는 상관없이 경험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신뢰도를 주게 마련이다. 결국 J도 바지를 올려 붙이고 개울물로 들어선다.

10월의 계곡물은 생각보다 차다. 하지만 우리의 머리 곳에는 단 하나 ‘환상적인 포인트’ 밖에 없었다. 그 곳이 나올 때까지 가보는 거다.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차디찬 계곡물에 담근 발은 허벅지까지 물에 젖었다. 이내 나올 것처럼 보였던 포인트는 가도 가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계곡이 더 좁아질 것 같은데, 저 앞의 굽이를 돌아보아도 그다지 좁아지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맞은 편에서 내려오는 부지런한 관광객도 있다. 한 시간 반쯤 갔을까, 두 갈래 길이 나온다. J는 이미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한 날 버리고 저 앞으로 내쳐 나간 지 오래다. 모처럼 드러낸 마른 모래밭에 장비를 놓고 한 숨 돌린다. J를 불러 본다. 잠시 후 넓은 쪽에서 J가 나타난다.

“햄…… 뭐 이래……”

“왜?”

“25km는 더 가야 끝이라는데?”

“……”

맞은 편에서 내려오던 관광객(등반객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에게 물어 본 모양이다.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다. 지금까지 왔던 기세로 보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고도 남을 것 같다. ‘젠장, 그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그 사진을 찍었다는 거지?’ 혼자 성을 내어 보기도 하지만 J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당당해 지자.

“그럼, 여기서 돌아가자.”
“……”

J의 눈초리는 싸늘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와 봤다며!’ 외치면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하긴 질척거리는 신발을 흙탕물에 담그고 허벅지까지 빠져가며 두 시간을 왔는데, 돌아가자니……

“여기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안 오는 곳이야.”

위안이랍시고 던진 나의 한 마디. 위안이라기 보다 차라리 변명에 가깝다. J도 지쳤는지 격하게 반항할 기세는 아니다. 얼치기 같은 선배 때문에 자네가 덩달아 고생이군. 미안허이……

돌아 나오는 길 역시 에누리 없이 두 시간 정도가 흘렀다. 시간만 허비한 것은 아니다. J와 나, 둘 다 무릎이 시큰거린다. 센 모래 물살에 쓸린 탓인지 허벅지 피부도 따끔거린다. 등산화는 철퍼덕거리고, 양말은 질척거린다.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밀도 높은 계곡물을 듬뿍 흡수한 청바지는 사정없이 발걸음을 짓누른다.

준비 없는 객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나마 난 2002년에 자이언의 다른 트레일들을 경험해 보았으니 자이언이 주는 아기자기함을 알고 있지만 J에게 자이언은 그야말로 고통스런 곳으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여행의 첫 시작부터 고생길로 만들어 버려 면목이 없다. 그래도 남들 없는 사진은 많이 건지지 않았니?


Posted by 이동구
자이언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선다. 어제 저녁과 아침 식사를 햇반과 깻닢, 김 등으로 대충 때우고 나서 계속을 허망하게 서너 시간 동안 헤메는 동안 물 몇 모금 말고는 먹지를 못했다. 알고 보니 J 이 인간, 도대체 뭘 먹지 않고서도 잘 견디는 거다. 나 같으면 끼니 거르고는 한 시간도 견디질 못하는데 말이다. 결국 첫날 점심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두어 시경 지나가다 보이는 예쁜 카페에서 하게 된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넓고 푸른 초원 위에는 관상용으로 풀어 둔 것 같은 버팔로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늦가을 햇살은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 졸기 딱 좋을 만큼 따스하게 비친다. 카페 주변에는 할로윈을 위해 준비 중인 듯한 큼직한 호박들이 쌓여 있다.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점심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자니 노곤하게 잠이 온다. 염치 불구하고 살짝 졸아 본다. 아침에 자이언 계곡에서 겪었던 그 치열한 고난의 행군이 어느새 아련히 기억 너머로 사라져 가는 듯 하다. 다만 어딘가 접질린 듯한 발목과 젖은 청바지에 쓸려 따끔거리는 허벅지 때문에 그게 바로 오늘 아침의 일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자이언 캐년에서 브라이스까지는 비교적 순탄한 드라이브 코스이다. 서너 시간이면 넉넉하고 그다지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는 아주 평범한 시골길이다. 그렇지만 중간 중간에 불쑥불쑥 등장하는 거대한 바윗돌들이 만들어 내는 풍광은 자면서 놓쳐 버리기에는 아까운 광경이다. J 녀석은 그 풍광을 모두 지나쳐 버렸다. 자이언에서 역시나 엄청 피곤했던 모양이다.

화창한 날씨에 감탄하며 브라이스에 도착했다. 바로 브라이스의 황홀한 뷰 포인트들로 향한다. 어딘가 여행안내서에서 본 대로 공원의 가장 안 쪽에 있는 포인트부터 돌기로 한다. 공원 입구에서 가장 먼 곳까지는 19킬로미터 정도, 대략 3-40분 정도면 주요 포인트들을 휘리릭 순방할 수 있을 시간이다.


Posted by 이동구
이번 여행을 떠나오면서 꼭 해 보고 싶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자이언 계곡의 ‘더 내로우즈(The Narrows)’를 답사해 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바로 브라이스 캐년의 바닥에 내려가서 엄청난 바위 기둥의 밑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브라이스 캐년의 바위 기둥들은 그야말로 놀랍다. 수 천, 수 만의 바위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무리 지어 서 있으면서도 하나하나 제 각각의 표정을 가지고 있다. 진시황의 병마용을 자연으로 끄집어 내어 수 백배로 확대시키면 이런 모습이 되려나……

브라이스의 끝자락으로 차를 몰고 가다 보니 날씨가 심상치 않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날이 흐려지더니 정상 부근에는 눈보라가 친다. 바람도 매섭다. 10월 중순의 날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다. 하긴 계곡 주변에는 이미 하얗게 눈이 쌓여 있다. 하루 이틀 쌓인 눈이 아니다. 여기는 이미 겨울이다. 해발 3000미터가 넘어가는 고도도 눈이 쌓이는데 한 몫을 한다. 기온이 떨어지지 않더라도 고도가 충분히 높으면 기압이 낮아지기 때문에 여간 해서는 눈이 녹지 않는다.

눈과 어우러진 브라이스도 환상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눈보라 때문에 카메라가 젖는다. 멋진 경치를 감상할 겨를도 없이 사진만 몇 장 찍고는 카메라를 감싸들고 차로 돌아왔다. 서너 군데의 포인트를 돌 때까지 계속 눈보라 속을 누비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와중, 아뿔싸, 렌즈를 떨어뜨려 버렸다. 애지중지하며 아끼던 광각렌즈를 카메라에 물리다 손이 곱아 제대로 끼워지지 않았던 것을 모르고 그냥 들고 뛰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와 렌즈를 받쳐들고 자세를 취하는 순간, 아주 낯선 느낌으로 렌즈가 손을 스쳐 지나갔고, ‘어 이게 뭐지?’하는 순간에는 이미 바닥에 렌즈는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그나마 천만 다행스럽게도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상 유무를 확인해 보니 크게 이상은 없어 보인다. 하늘이 도왔다. 그런데 15밀리에서 30밀리까지의 화각을 커버하는 광각렌즈인데 18밀리 밑으로는 줌이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광각은 18밀리까지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이야기. 사진을 하는 분이라면 이게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인지 잘 아실 것이다. 광각에서 1밀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3밀리나 손해를 봐야 하다니 말이다.

서둘러 포인트들을 돌며 사진을 찍고 마지막으로 선셋포인트에서 석양에 지는 브라이스를 찍음으로써 오늘의 출사는 마무리했다. 아직도 자이언에서 고생한 다리는 정상이 아니다. 아무래도 자고 나면 더 아플 것 같아 걱정이 된다. J 역시 제법 지쳐 보인다.

공원에 들어서기 전에 잠시 들러 예약한 숙소는 좀 엉터리같다. 난방도 잘 안되는 것 같고, 아침도 주지 않으면서 방값은 비싼 편이다. 이 동네가 원래 좀 그런 모양이다. 가까운 곳에 다른 마을이 없으니 그럴 법도 하다. 5년 전에 왔을 때에도 숙소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듣도 보도 못한 소고기 튀김으로 느끼하게 저녁을 때우고 일찍 잠을 청한다. 내일 아침엔 꼭 브라이스의 아침을 찍어야 한다.


Posted by 이동구
시차에 적응이 되어 있지 않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무척 쉽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대로 잠을 자기가 힘들다. 몸은 피곤한데 머리는 띵하면서 자꾸 잠을 거부한다. 얼핏 꿈을 꾸기는 하지만 계속 다른 꿈이 이어진다. 왠지 방 안이 답답하다. 자다 깨서 밖에 나가 본다. 별이 가득하다. 별이 너무 많아 알고 있는 별자리 찾기가 힘들다. 그게 그 별 같고 저쯤에 하나쯤 있을 자리에 빼곡하니 별들이 빛나고 있다. 어느 구석을 들여다 보아도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부지기수로 모여 있는 듯 하다. 아! 저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었다면……

둘째 날 아침, 서둘러 준비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토러스 뒤로 랜드크루저가 바짝 붙어 따라온다. ‘저 놈 역시 사진가인 모양이군.’ 느긋할 수 밖에 없는 미국의 산골짜기 시골에서 해도 뜨기 전의 이른 새벽부터 험하게 차를 몰아대는 건 해를 쫓아 하루를 시작하는 사진가일 가능성이 거의 틀림없다.

한달음에 차를 몰아 브라이스의 선라이즈 포인트에 들어선다. 따라오던 렌드크루저 역시 급하게 차를 세운다. 짜식, 서두르긴……. 옷깃을 추스르고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를 챙겨 포인트를 오른다. 그런데…… 무릎이 예사롭지 않다. 시큰거리기도 하고, 어쩔 때는 제법 통증이 오기도 한다. 인대가 약간 늘어난 데에다 연골에도 살짝 상처가 생긴 모양이다. 게다가 맨발로 물 속을 헤치고 다녔던 발에는 여기저기 피부가 벗겨져 쓰리다. 그야말로 상처투성이 상이군인의 몰골이다.

할 수 없다. 절뚝거리며 삼각대를 을러메고 포인트를 오른다. 다행히 그리 먼 길은 아니다. 포인트에는 이미 3-40명의 사진가들이 이제 막 떠오른 해를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다. 아! 이렇게 찬란한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다. 다리 아픈 것도 잊어 버리고 사진을 찍어댄다. 5년 동안 잊지 못하고 기다려 온 순간이다. 하늘엔 구름도 없다. 뿌연 안개도 없다. 오직 동전만한 원반 모양의 태양과, 그 앞에 찬란히 하루의 첫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태고의 자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장관 앞에서 사진가는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 이 순간은 담을 수 있어 행복하다. 브라이스에서 이 기막힌 순간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 정말로 행복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제 떨어뜨려 사라져 버린 15밀리의 광각도 아쉽지 않다. 변변치 않은 내 사진 실력도 아쉬워할 틈이 없다. 이 놀라운 자연의 신비, 몇 십 억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반복되었을 이 순간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 모든 아쉬움은 날려 버릴 수 있다.

계곡의 제법 깊숙한 곳까지 햇살이 드리운다. 급한 성격의 사진가들은 이미 다른 포인트로 떠나고 주변에는 뒤늦게 찾아온 어중간한 관광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J가 삼각대에 카메라를 얹어 놓은 채로 저쪽의 바위 뒤에서 돌아 나온다. 저 녀석 역시 어느 구석에서 자기만의 멋진 하루를 시작했으리라. 어제 자이언에서의 고생이 어느 정도는 만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햄, 진짜 멋지다.”

“많이 찍었어?”

“찍기야 많이 찍었죠. 실력이 안 따라와 주니 그렇지……”

늘상 오가는 대화가 여기까지 와서도 반복된다. 눈으로 목도한 광경이 멋질수록 그것을 담아야 하는 얼치기 아마추어 사진가의 심적 부담은 더욱 더 심해질 수 밖에 없다. 헌데 J도 걸음이 편치가 않다.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란다. 브라이스의 저 아래 편까지 내려가 보는 것은 다음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 언제가 될 지 기약은 없지만 말이다. 여행이란 늘 무엇인가를 흘리고 다니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것이 선글라스일 수도 있고, 아끼던 모자일 수도 있으며,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던지, 혹은 그 밖의 무엇이던 말이다.

많은 사진과 함께 또 그 만큼의 미련은 남기고 브라이스를 떠났다. 브라이스 캐년을 떠나 2-3킬로미터 밖에 있는 자그마한 뷰포인트. 우리는 여기서 브라이스의 아래쪽을 엿 볼 수 있었다. 위에서 본 브라이스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푸르디 푸른 하늘과 함께 브라이스의 색을 담을 수 있었던 행운, 아마도 브라이스가 우리에게 선사한 작별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Posted by 이동구


볼더(Boulder)에서 기름을 넣을 생각이었다. 마을 초입에 허름한 주유소가 하나 있는 것을 그냥 지나쳤다. 조금 지나니 분위기가 이상하다. 마을이 끝나가는 느낌. 다음 주유소는 한참을 더 가야할 듯 하다. 무척이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X-File에 종종 나오는 Boulder는 상당히 큰 도시였던 것 같은데...(콜로라도 주에 있는 Boulder가 그 도시였던 것 같다.)

차를 돌려 지나쳤던 주유소로 되돌아 갔다. 역시 허름하고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기름을 넣고는 가게로 들어가 카푸치노와 치즈케익을 샀다. 조금씩 비가 오는 가운데 가게 옆의 벤치에서 케익과 커피를 먹고 있자니 개가 한 마리 온다. 순해 보여 케익 한 조각을 주었더니 냉큼 받아 먹는다. '아마 배 고픈 걸로 따지면 내가 너 보다 더 할 걸…… 넌 그래도 여기가 네 집이잖니' 속으로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씩 나누어 준다.

 그러던 중 개 주인인 듯한 여자아이가 쪼르르 뛰어 와서는 개를 나무란다.

"구걸하지 말랬지? 이리와."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로 개의 표정이 구걸하는 듯 하다. 더 불쌍해진다. 늦은 아침을 개와 나누어 먹는 옆에서는 아까의 여자아이와 할아버지인 듯한 노인이 장난감 활을 가지고 놀고 있다. 우리 딸들 생각이 난다.

"How old are you?"

아이에게 물었다.

"Five..."

아이의 대답.

"Five and a half."

할아버지의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나도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다고 하면서 할아버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서 왔느냐-한국에서 왔다-한국차 좋다-^^-스바루가 한국차 맞지?-아니 일본차다.-구분이 잘 안된다....

이렇게 이어지던 중 할아버지는 해병대로 오끼나와에 근무 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한국의 상황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했다.

"해병대는 강하기는 한데 머리가 나뻐. 최악의 조합이지."

라는 우스개까지 덧붙이는 할아버지. 무슨 사연이 있어 다섯살짜리 여자아이와 지저분한 개와 이 시골에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할아버지 눈에는 혼자서 여행다닌다는 쬐끄만 동양 남자아이가 더 갑갑해 보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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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를 뒤로 하고 한 동안 우리는 별 말이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행선지는 당연히 캐피톨리프 국립공원이었고, 거기까지 가는 동안 별다른 포인트는 없다. J가 운전을 맡았다. 메사베르데를 본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한참을 잤던 모양이다. 험한 바위산은 보이지 않고 한적한 농촌 마을의 서정이 펼쳐진다.

“이런 동네에 사는 아이 중에는 어쩌면 맥도날드나 버거킹을 모르는 아이도 있겠어요.”


잠에서 깬 걸 눈치챈 J가 말을 건낸다. 그랬다. 도시에서는 늘상 달고 사는 그런 간판은 이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주유소도 어쩌다 스탠드 하나 달랑 세워져 있는 가게가 전부인 경우도 있다. 열심히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잠시 사람사는 마을이 지나가고 나니 또다시 돌 산 틈을 돌아 길이 이어진다. 길은 계속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이내 양 옆으로는 천길 낭떠러지가 만들어져 버렸다. 낭떠러지를 양 옆으로 두고 핸들을 이어 받는다. J에게 살짝 고소공포증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길을 어떻게 찾았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하늘은 파랗고 뭉게구름은 하얗게 피어 오른다. 전형적인 가을하늘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보는 가을 하늘 보다도 서너 배는 더 파란 듯 하다. 눈을 부릅뜨면 별이라도 보일 정도로 짙은 푸름, 그리고 그 아래 노랗게 익어가는 타향의 가을, 사진이고 뭐고 그냥 잠시 차를 세워 놓고 하늘을 본다. 그리고 이국의 가을을 최대한 깊숙이 호흡해 본다.

산맥을 하나 꼴딱 넘고 나니 또다시 돌잔치다. 어린 시절, 스타워즈를 비롯한 헐리우드의 SF 영화들을 보면서 그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감탄을 하곤 했었다. 도대체 외계행성의 지표면을 어떻게 저리도 멋지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저리도 기기 묘묘한 자연 현상들을 상상만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 곳을 여행하면서 마치 선생님의 강의용 참고서라는 것을 처음 들춰 본 때와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된다. 상상이라고 생각했던 외계 행성의 온갖 모습들이 모두 그 곳에 있다. 어떤 곳은 알투디투와 에스피오가 조난당한 행성이었고, 어떤 곳은 방위군과 제국군 간의 치열한 지상전이 벌어졌던 벌판과 똑같다. 내가 그 동안 그 들만의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은 오롯이 그 들이 올라서 있는 대지의 모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상상력, 혹은 창의력이란 얼마나 많은 조각을 가지고 레고 놀이를 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놀이를 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하고 체험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창의력이라고 해서 없는 것을 뚝딱 만들어 내는 재주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의 범위, 그릴 수 있는 그림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 주는 것, 그것이 상상력과 창의력의 원천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다 보니 어느새 캐피톨리프에 도착했다. 운전이 과했는지, 여행의 피로가 쌓여가는지 살짝 몸살기가 도는 듯 하여 J가 가져온 감기약을 염치 불구하고 얻어 먹고는 이내 골아 떨어져 버렸다. J는 그 사이에 캐피톨리프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곳을 한 바퀴 돌았던 모양이다. 문득 잠에서 깨어 보니 볼 것 없는 곳 괜히 돌고 나왔다고 혼자 투덜거리고 있다.

5년 전보다 많은 곳이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 캐피톨리프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구즈넥(Goose Neck, 구부러진 오리 목처럼 물이 굽어 흐르는 곳)은 전에는 없던 곳이다. 역시 이 코스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 모양이다. 이 곳에 와서 J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이런 거 하나만 한반도에 있었어도 대여섯 시간 차 몰고 가서 찍어 왔을텐데…”

캐피톨리프를 떠나 모압으로 가는 동안은 내가 운전했다. 역시나 피곤했던지 J는 이내  골아 떨어진다. 혼자 운전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긴 하지만 많이 피곤한 노릇이다. 둘이서 교대로 운전하다 보니 피로는 훨씬 덜하다. 그렇긴 하더라도 자이언에서 다친 다리는 잊을만하면 욱씬거린다.

모압에 가기 위해서는 24번 도로를 타고 가다 I-70고속도로를 타게 된다. I-70 고속도로 가기 전에 약 80마일 정도의 구간이 지도 상에는 거의 곧은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높낮이만 있을 뿐 좌우로는 변화가 없다.
핸들을 건드릴 일일 없다. 물론 배수를 위해 좌우로 낮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가볍게는 잡고 있어야 하지만 내 앞으로 이어진 길은 완전히 동일하게 내 뒤로도 이어져 있다. 아주 멀리 희미하게 바위 산이 몇 개 보일 뿐 사방은 완전한 평야다. 우리나라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아쉽게도 골아 떨어진 J는 이 광경을 놓치고 말았다. 하긴 내가 졸면서 놓친 풍광도 제법 될텐데…

역시 5년 전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고블린(Goblin)이라는 주립 공원을 잠깐 들렀다. 종유석을 몇 십 배 정도로 확대해 놓은 듯한 바위 돌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모양도 제 각각이고,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는 걸 보면 한 시간 정도만 기다려 석양이 되면 아주 예쁜 색을 띌 것 같다. 하지만 모압까지는 제법 거리가 남아 있기에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잠시 몇 컷 찍고 다시 길을 떠난다.



늦은 시각에 모압에 도착했고, 일요일 저녁이라고 방심하고 있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대부분의 모텔들에 빈 방이 없었다. 마을의 거의 끝까지 가서야 방을 잡을 수 있었다. 카운터를 보고 있던 아가씨가 착해 보여 디스카운트를 요구해 봤더니 많이 깎아준다. 하루치 밥값은 충분히 빠진 듯 하다.

숙소 옆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하고 맥주 캔 몇 개를 사 들고 들어와 목을 축인다. 생각보다 J도 재미있어 한다. 가끔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을 아치스(Arches National Park)국립공원과 캐년랜드(Canyonlands National Park)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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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느긋하게 모텔에서 주는 아침을 먹기로 했다. 간단한 아침 뷔페였지만 먹을 것이 제법 많다. 토스트와 커피,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해결한다. J는 와플을 만들어 왔다. 많이 달기는 했지만 즉석에서 만들어 따끈하게 먹는 와플도 맛있다. 월요일 아침, 주변에는 백발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다. 은퇴하고 한가롭게 여행 다니는 노부부들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단체 관광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커플이 다니거나 많아야 친구인 듯한 두 커플이 함께 다니는 정도. 모여 있는 사람 수에 비해 식당은 무척 조용하다.

아치스와 캐년랜드 중에서 어디를 먼저 갈 것인가를 가지고 의견이 갈렸다. J는 캐년랜드를 고집했다. 5년 전에는 시간이 많지 않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모텔 주인과 의논을 해 보고 나서 아치스를 선택했었고, 캐년랜드에 대해서는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헌데 J는 사진 동호회에서 캐년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더 감명 깊게 들은 모양이다. 아예 아치스는 별로 볼 것이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기분이 좀 상했다. 그래도 난 한 번 다녀왔었는데 말이다. 다음날 아치스를 가기로 하고 캐년랜드로 향했다.

캐년랜드는 그린강과 콜로라도강이 만나면서 만들어 내는 거대한 풍경이 장관이다. 승용차로 갈 수 있는 뷰포인트들이 몇 군데 마련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대자연의 거대함을 느낄 수 있다. 차에서 내려 2-30미터만 가면 발 아래로 수백 미터의 낭떠러지가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서 몇 킬로 미터 떨어져서는 또 다시 몇 백 미터의 계곡이 펼쳐진다. 자연이 만들어 낸 거대한 조각이다. 저 멀리 절벽 아래 펼쳐져 있는 벌판에는 가느다란 물길과 함께 비포장 도로가 사방으로 이어진다. 승용차 보다는 사륜 구동차로 저 곳을 누비고 다녔어야 하는 데 많이 아쉽다.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섰는데 그다지 무서움이 없다. 좀 더 좋은 포인트를 찾기 위해 절벽 끄트머리를 따라 한참을 걸어 보기도 하고, 절벽 끝에 한참을 서서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맑은 날씨였음에도 워낙 거리가 멀어 그런지 하늘이 약간 뿌연 듯한 느낌이다. 아주 추운 겨울이 되어야 멀리까지 쨍한 하늘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상상하기 힘들만큼 거대한 자연을 음미하며 몇 군데 포인트를 돌아다니다 점심 식사를 위해 모압으로 다시 돌아왔다. 왕복 15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지만 이젠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먹을 것을 좀 준비해 오는데 미처 생각을 못했다.

캐년랜드 입구에서 좌회전을 하면 데드호스(Dead-horse)라는 주립공원이 나온다. 같은 국립공원 지역인데 따로 주립공원을 만든 이유도 잘 모르겠고, 따로 입장료를 받는 까닭도 잘 모르겠지만 들러 봐야 할 것 같았다. 국립공원들과는 달리 주립공원은 대개 뷰포인트가 한 두 곳 정도로 제한되어 있다. 데드호스 역시 전망대 하나의 뷰포인트가 전부. 하지만 이 곳에서 보이는 풍광이 또한 장관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 곳에서 석양을 기다리며 마냥 있고 싶었지만 가능한 많은 뷰포인트를 보고 싶어 하는 J때문에 다시 캐년랜드로 향한다.

차로 갈 수 있는 포인트들은 모두 살펴 보았고 시간이 좀 남는다. 아치스까지 가기엔 빠듯하다. 일몰이 가장 멋질 듯한 포인트를 골랐다. 풍경 사진은 해가 뜨고 난 직후, 혹은 해가 지기 직전이 가장 아름답다. 낮은 고도에 떠 있는 태양이 두터운 대기를 뚫고 내려 보내는 햇살은 한 낮의 태양빛과는 사뭇 다른 빛을 가지고 있다. 이 빛을 잘 활용하면 흔히 보기 힘든 멋진 풍경 사진을 찍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안내 책자에 멋진 사진이 나와 있는 곳을 다시 찾아 갔다. 해가 지려면 아직 4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차에서 내려 나름대로 포인트라고 생각해 두었던 곳으로 찾아 갔다. 인적 없는 풀 숲을 헤치고 5분쯤 걸어가니 낭떠러지가 나온다. 바위 위에 삼각대를 펼치고 떨어지는 해를 기다린다. 지금 이 순간은 나 혼자다. 간혹 도롱룡이 발 밑으로 지나쳐 간다. 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본다. 파랗다. 파랗다 못해 검푸르다. 세상은 내 발 아래 펼쳐져 있고 나는 하늘 아래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있다. 사진 따위는 찍지 못해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자유로움, 이 때문에 여행을 하는 것이다.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리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이라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살포시 몸을 날리면 저 너머 골짜기 마루턱에 살짝 내려 앉을 것만 같다.

결국 멋진 일몰 사진은 건지지 못했다. 해가 떨어진 다음 삼각대를 챙겨 주차장으로 돌아오다 보니 여기 저기 풀섶에서 사람들이 몇몇 나와 비슷한 차림으로 길을 찾아 나온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자기만의 포인트를 찾아 나섰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다. 그 중 눈인사를 나누게 된 사진가에게 아쉬움을 살짝 이야기해 본다. 전문 사진가들은 일년 내내 바로 옆에서 캠핑을 하면서 사진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럴만도 하다. 살면서 한 두 번 오게 되는 아마추어가 남을 감동시킬만한 사진을 찍는 다는 건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여행은 여행이고 사진은 사진이다. 여행을 하면서 작품 사진을 찍는 것은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사진을 위한 여행이라면 그에 걸맞는 준비가 따라야 한다. 해는 언제 뜨고 지는지, 해가 뜨는 방향과 진행되는 방향, 그리고 매 시간마다 해의 위치를 가늠해서 최적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찾아 내야 하고 그 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이동수단과 이동 시간을 면밀히 계산하여 계획을 세워야 한다. 치밀한 작전 계획이 필요한 셈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여행을 즐기는 편이 좋다. 사진은 그저 여행의 기억을 보조하는 수단일 뿐…… 서글프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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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에서부터 관광을 시작하는 원칙을 세웠다. 어디선가 본 기억도 있고, 간단히 생각해 봐도 그 곳에 다다르기 이전에 존재하는 포인트 보다 하나라도 더 나은 것이 있지 않으면 더 먼 곳에 포인트를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치스에서도 가장 멀리 있는 더블-오-아치(Double-O-Arch)부터 하루의 여행을 시작했다.

아치스 역시 입구에서 가장 멀리 있는 포인트까지 19마일에 이를 정도로 광활한 국립공원이다. 미국의 국립공원은 크다. 차로 돌아도 하루 종일 걸릴 정도로 거대하다. 그리고 곳곳에 걸어서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트레일(Trail)들이 잘 마련되어 있다. 어떤 트레일은 동네 뒷 산을 산책하는 정도도 있고, 어떤 곳은 제법 암벽 등반에 가까운 곳도 있다. 5분이면 갈 수 있는 곳도 있고 두어 시간을 꼬박 걸어야 하는 곳도 있다. 이런 모든 정보는 공원 입구에서 나눠주는 안내 자료에 상세히 나와 있을 뿐 아니라 공원 입구의 비지터센터에 방문하면 직접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도 잘 마련되어 있어 미리 준비만 잘 해 간다면 꼬마들도 재미있게 여행할 수 있다.

이러한 국립공원들은 20불 내외의 입장료를 받고 있으며 우리는 80불을 내고 일 년짜리 패스를 끊어서 다녔다. 이번 여행 동안 15불에서 20불 정도는 절약을 한 셈이다. 일 년짜리 패스는 대략 승용차 한 대 단위로 끊을 수 있으니 서너 명이 여행을 한다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될 듯 하다.

더블-오-아치는 커다란 바위에 동그란 구멍이 위, 아래 나란히 뚫려 있는 바위이다. 아래에 있는 구멍이 위에 있는 구멍보다 훨씬 작은데 아래쪽 구멍으로 사람들이 드나 든다. 더블-오-아치까지 가는 트레일은 제법 먼 트레일이다. 왕복 두 시간짜리이며 난이도도 제법 높다. 자이언에서 고생한 다리가 충분히 회복되었을지 걱정이 좀 되기는 했지만 출발이다.

아치스는 캐년랜드와는 달리 아기자기한 바위들의 모습들이 절경을 이룬다. 아기자기하다고는 하지만 그 크기는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거대하다. 캐년랜드가 거대한 평원에 펼쳐져 있는 부조라고 생각 한다면 아치스는 마치 거대한 평원에 진흙으로 빚어 놓은 조각상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다. 캐년랜드는 위에서 내려다 보는 반면 아치스는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경우가 많다. 바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상반된 곳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더블-오-아치까지 가는 동안에도 랜드스케이프 아치 등 제 멋대로 생겨먹은 바위 덩어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눈 앞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길이 3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돌덩어리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가던 도중 바위를 오르내리다 J가 심하게 넘어졌다. 카메라도 바위에 내동댕이쳐 지기도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거나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조심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왕복 두 시간의 트레일을 망설임 없이 선택한다. 역시 단체 관광객은 찾아 보기 힘들다. 단체 관광객을 이끌고 이 곳까지 오기에는 리스크가 크긴 하다. 하지만 여기를 와 보지 않고서는 아치스를 구경했다고 하기 힘들 텐데……

해가 아치를 완전히 비출 때까지 30분 정도 머물러 있었다. 역시나 이렇게 머물러 있다 보면 사진을 하는 사람과 일반 관광객들과는 뚜렷이 구분이 된다. 도착하자마자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고, 주변을 살피다가 짐을 내려 놓고 대기 모드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자가 사진가들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들에게 친근하게 눈인사를 건낸다.

“Waiting for the sun light?”

“Yes.”

아주 간단한 대화지만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통할 수 있는 공감대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아치에 해가 비치기 시작하면서 사진가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좀 더 높은 곳을 찾는 사람, 색다른 앵글을 찾아 여기 저기 돌아보는 사람, 때마침 찾아 든 햇빛을 놓칠 새라 여자친구의 포즈를 재촉하는 사람…… 갑자기 주변에 사람이 많아진다. 아마도 이 순간을 맞춰 찾아온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우리는 그렇게 아치스의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역시 왕복 두 시간짜리 트레일이었던 델리케이트 아치는 여전히 멋진 장관을 뽐내고 있었다. 비록 녹초가 되긴 헀어도 말이다. 사실 델리케이트 아치는 석양이 환상적인 포인트이지만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맞추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여기서 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아직 보지 못한 포인트를 향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루를 오롯이 아치스에서 보낸 후 J에게 감상을 물었다.

“언 놈이 아치스 별로 볼 거 없다고 했는지 때려 주고 싶다.”

하긴 나도 5년 전에 캐년랜드보다는 아치스가 낫다고 했던 친구를 다시 만난다면 ‘네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Posted by 이동구